- 歌曲
- 时长
简介
이건 저와 제 친구들의 이야기입니다. 한 동네에서 같이 뛰놀며 자라고 여태 가까이 지내는 우리친구들. 그리고 그 중에 한 명. 특별한 친구에 관한 노래입니다. 첫 기억이 국민학교 보이스카웃 인걸보니 40년이 훌쩍 넘은 거 같네요. 노란색머리(염색도 아닌데)에 파란유니폼이 잘 어울리던 친구는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는 인기쟁이 였어요. 같은 반이던, 아니던 저를 포함한 또래 친구 몇명은 과외공부도 같이하고 발야구며 축구며 늘 같이 몰려다니며 놀았죠. 나란히 까까머리에 까만 교복을 입은 중학생이 되고도 저흰 언제나 같이 어울렸답니다. 근사한 소니스테레오를 갖고있던 친구 방에서 처음 레드제플린과 AC/DC 와 Dio를 들었을 때.. 그때가 선명합니다. 그때부터 였나봐요 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음악에 이끌려 musician을 꿈꾸게 되었답니다. 고등학교가 몇 군데 나뉘는 바람에 조금은 뜸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같은 교회를 다니며 (아마 우린 놀러 다녔을 꺼에요) 음악을 더욱 빠져들어서 저와 몇 친구는 밴드도 시작했답니다. 수학여행이며 각종 학교 행사에, 파고다공연에.. 그때마다 늘 친구들이 함께 있었어요. 그리고 방학이면 (그땐 그저 시골이었던 )가평, 강촌, 현리 같은 곳으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고딩들의 캠핑도(?) 가곤 했답니다. 밤새고 걷다가 아무데서나 텐트치고 자고, 물고기 잡고, 밥 해먹고, 기타치고, 음악 듣고, 노래 부르고, 친구의 그 좋은 소니스테레오에 댄스음악을 틀고 신나게 막춤도 췄죠. 친구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지만 우리끼리 있을 때는 가장 겁 없고 욕 많이 하고 위험한 거든 뭐든 가장 먼저 해보는 개척자(?) 였어요. 내가 음악을 택했을 때 친구는 공부를 더했죠. 더 좋은 대학에 가겠다고.. 한번도 힘든 내색은 없었어요. 그리고 해냈죠. 참 멋진 친구랍니다. 나를 포함한 친구 몇은 군 전역 후에 음반 내겠다며 시골에서 합숙 훈련도 하고 난리도 아니었답니다. 힘들었지만 즐거운 시간이었어요. 그러는 사이 친구는 대기업직원이 되고, 또 어떤 친구는 선생님도 되고, 사진작가에, 사업가가 된 친구에 건설현장에서 땀 흘리고 매일 술 마시는 친구에.. 우리모두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. 어쨌든 다들 바빠 보였어요. 지식과 기술을 연마하고 커리어를 쌓고 사회의구성원으로 제 몫을 하려고 애쓰는 그런 노력들이 모여서 어른이 되나 보다하며 살았던 거 같아요. 모두들 그렇게 살아왔고, 그렇게 살고있으니까요. 하나 둘 결혼하고 아빠 엄마가 되고. 우리들이 매일 동네에 모여서 놀던 딱 그만큼 우리들의 아이들이 컸을 때 즈음.. 어느 날 문득 ‘친구들 만나는 시간이 제일 좋구나.’ 하고 생각하게 되었던 거 같아요. 가끔 만나는 친구들과의 자리가 가장 마음 편하고 몇 시간 동안 쉬지않고 웃고 떠들 수 있는 시간이더군요. 지금도 여전히. 친구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습니다. 하지만 친구들의 아이들을 너무 이뻐했죠. ‘저렇게 이뻐하면서 왜 결혼은 안할까’ 생각이 들 만큼요. 언제든 만나면 양손에 한 명씩 손잡고 마트에 데리고 가서 ‘아저씨가 다 사줄께. 암거나 골라!!’ 아마 우리의 아이들은 친구를 산타아저씨라고 기억 할지도 몰라요. 용돈도 듬뿍 주거든요. 친구들 모임도 늘 그 친구가 먼저 전화 했드랬죠. ‘야이 xx야. 이번 주말에 보자. 무조건 나와’ 그럼 우린 다 나가야한답니다. ㅎ 언제인지 기억은 안 나는데 제가 그랬나봐요. ‘야! 우리 죽기 전에 미국 여행은 함 같이 가자 ‘ ‘왜?’ ‘가보고말해 짜식아 을매나 좋은데.’ ‘미국 어딜 가자고?’ ‘뭐. 가능한 다 가보자. 주현이는 뉴욕에 살고, 재혁이는 LA 사니까 잘됐네. 차 렌트해서 미쿡 횡단해보지 뭐!’ 친구 중엔 해외여행 한 번 못가본친구도 있어서 꼭 같이 해보고 싶었어요. 넓고 큰 나라 가서 다같이 좋은 거, 신기한 거 보고 감탄하고 맛난 것도 먹고.. 그러고 싶었거든요. 미국 유학파 였던 친구가 가장 맞장구를 쳐주네요 ‘맞아. 니들 다 가봐야 해. 가서 좀 봐라 xx들아 허구헌 날 동네에서 소주나 까지말고 ㅋㅋㅋ’ 그후론 만나서 한잔하고 취하면 늘 단골 레퍼토리였죠. ‘미국 가서 응? 그냥 스포츠카 타고 응? 헤비메탈 졸라 크게 틀고 하이웨이 쌔려 밟는거야 응!?!!’ (누군가)’야.. 난 마누라한테 허락 받아야 돼..’ (일동) ‘아 저이c !! ‘ ㅎㅎㅎㅎㅎ 작년에 일본, 미국 공연이 있어서 두 달여 떠나게 되었었어요. 그리고 뉴욕 살던 친구는 (한국의 모 대학에서 몇 년째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) 이제 다 그만두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해서 겸사겸사 공연 떠나기 전에 만났답니다. 뭐 송별회는 집에다 하는 말이고 걍 술 약속이죠. 얘기 중에 친구가 갑자기 ‘야. 나랑 누구랑 미국여행 가기로 했다. 갈 사람 붙어’ ‘엥!? 언제?? 나 공연 가는데 날짜 맞으면 맞춰보자.’ ‘안 맞네. 우이쒸. 왠 갑자기 미국이여!?!’ ‘맨날 얘기했잖아. 저새끼들 냅두면 죽을 때까지 ㅜ 못가지 싶어서 내가 뺀질이 꼬셨지. ‘ ‘아.. 그래도 미리 말 좀 하지. 성질도 급하다.’ ‘야. 니들말야 우리가 라스베가스가서 쭉쭉빵빵 옆에 끼고 사진 찍어서 보내 줄 테니까 부러워 하지나 마라잉!? ‘ 그렇게 우린 즐거운 작별(?)인사를 나누고 헤어졌습니다. 그리고 두 달쯤 뒤에 제가 귀국하고 며칠 있다 두 친구도 귀국했어요. 그날 단톡방에서 사진 올리며 짜릿한 후기(?) 에 다들 열광을 했드랬죠. ‘안되겠다. 우리 언능 만나자. 이건 만나서 들어야겠다!! ㅋㅋㅋ’ … 그리고.. 그 날밤.. 친구는 떠났습니다. 너무나 갑작스레 떠나버렸습니다.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어요. 우리들 모두 받아들 일 수 없는 소식에 오열하고 친구의 영정 앞에서 그렇게 또 울고.. 장례기간동안 내내 울고.. 이해할 수 없는 친구의 선택에 무너지고. 그래서 더 울고.. 눈물이 마르지 않는 건 나이 때문인가요.. 알고 보니 친구는 아주 오랜 시간을 싸워왔었고.. 어떻게 떠날지 고민 했나 봐요. 40년 넘은 친구인데 그런 친구 맘도 몰랐던 내 자신이 야속해서.. 그래도 한번 말이라도 던져주지. 이 친구야.. 하는 맘에 다시 울고.. 너무도 허망한 죽음에 우리모두는 그저 눈물만 흘렸습니다. 장례가 끝나고도 오랫동안 슬프고 힘들었습니다. 49제를 앞둔 어느 날.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는 노래를 만드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. 우리들의 이야기와 친구에게 하고싶은 말들을 담아서요. 노래를 만들어도 가사까지 쓰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했지만 꼭 쓰고 싶었습니다. 근데.. 대부분 가사를 쓰면 간접경험을 이야기 하게 되는건데 (노래도 노래 연기이듯이 ) 진짜 나의 이야기를 쓰는 건 너무 힘들었어요. 곡을 쓰면서 우는 건 상상도 못했습니다. 노래를 완성하고 데모를 만들어서 뉴욕 있는 주현이에게 기타를, LA사는 재혁이에게 베이스를. 그리고 같이 마지막여행을 하고 돌아온.. 어찌보면 가장 큰 슬픔을 안게 된 용한이에게 당연히 노래를 부탁했습니다. 그렇게 만든 노래입니다. 저와 제 친구들이 살아온 우리들의 이야기이고 먼저 떠난 친구를 그리워하며 그 맘을 담아서 만들었어요. 너무도 개인적인 노래라 ‘많이 들어주세요. 사랑해주세요 ‘ 이런 말은 어울리지도 않고 그럴 나이도 아니고요. 혹시나.. 누군가.. 이 노래를 듣고 감정이입이 되거나 어쩌면.. 한 분이라도.. 우리 같은 친구들, 아니 한 명의 친구라도 같이한 추억과 소중한 기억들이 떠오른다면 그럼 됩니다. 저흰 감사합니다. 제 친구가 가장 좋아할 거에요. ■ 크레딧 작사. 작곡. 편곡 : 안준영 보컬 : 정용한 피아노. 하모니카 : 안준영 드럼 : 장혁 베이스 : 허재혁 기타 : 박주현 Recording & Mixdown : 정두석 (만혁네STUDIO) Mastering : 전훈 (Sonic Korea) Producer : 안준영 제작 : 찹스틱뮤직 (Chopstick Music)